신선한 경험에 그치치 않고, 현시대 한국음악을 꾸준히 전할 시기
이한빈_그레이바이실버 대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다양한 색깔들이 뒤엉켜 찬란한 빛을 내는 도시, 체코 오스트라바
유럽의 10대 축제 중 하나인 체코 오스트라바의 음악 축제, ‘컬러즈 오브 오스트라바(Colours of Ostrava)’는 거대한 공장지대를 예술 축제 현장으로 바꿔낸 역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다양한 음악 장르를 아우르는 라인업으로 유명한 곳이다. 실제로 필자가 경험한 축제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규모가 거대했는데,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참여형 부스와 함께 다양한 국적을 가진 예술가들의 전시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컬러즈 오브 오스트라바의 저명한 포럼인 ‘멜팅 팟(Melting-pot)’ 섹션에서는 올해도 200명이 넘는 프리젠터와 약 3만 명 규모의 방문자가 참여하여 예술과 생활 전반에 걸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수많은 공연 예술계 관계자들이 유럽 시장 조사와 네트워크를 위해 해당 축제를 찾았다. 이렇듯, 축제의 이름과 같이 다양한 색깔을 내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거대한 가스탱크를 개조하여 만든 ‘공 스테이지(Gong Stage)’는 1,500석 규모로 축제장 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실내 공연장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타악그룹 ‘그루브앤드’와 함께 7월 20일 저녁 축제를 장식하였다. 타악적인 요소를 통해 전통성과 역동성을 잘 보여준 그루브앤드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로 올라간 우리는 유럽 관객들에게 한국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자 했다.
한국음악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가지는 다양한 모습일 것이며 그 가지에서 맺힌 열매는 다양한 색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색깔이라도 그림자는 모두 회색이듯, 그레이바이실버가 그려낸 회색 또한 모든 색과 섞이고 또 구분되며 동시에 순수음악으로써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색깔들이 뒤엉켜 찬란한 빛을 내는 도시, 오스트라바를 뒤로하고 우리는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의 여름을 물들인 한국의 예술,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불리는 뉴욕. 그중에서도 링컨 센터(Lincoln Center)는 뉴욕 예술의 심장부 역할을 담당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우리는 이번 링컨센터의 여름 축제 ‘썸머 포 더 시티(Summer for the City)’ 속 특집 프로그램인 ‘코리안 아츠 위크(Korean Arts Week)’에 초청을 받았다.
우선, 뉴욕 시민들에게 링컨센터의 여름 축제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바로 팬데믹 기간, 위축되었던 시민들의 예술 활동을 다시금 격려하는 치유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2022년부터 시작된 썸머 포 더 시티는 링컨 센터가 가지고 있는 클래시컬한 이미지에서 나아가 다양한 시민 관객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 마련을 목적으로 개최된 대형 축제이다. 올해 축제는 한국문화예술 전반을 다루는 ‘코리아 아츠 위크’가 한 축을 담당하여, 한국의 음악, 전시 미술, 문학 등으로 빈틈없이 구성된 세부 프로그램들이 뉴욕의 여름을 나흘 동안 가득 채웠다.
한국의 현시대 창작음악을 소개하게 된 '동양고주파'와 '그레이바이실버'의 공연은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아트리움(David Rubenstein Atrium)에서 양일간 각각 열렸다.
그 외에도 인디음악, 클래식, K-pop DJ Night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음악이 링컨 센터 곳곳에서 울려 퍼졌는데, 해당 축제에서 한 나라를 포커스하여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많은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레이바이실버의 무대에도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의 관객이 찾아와 한국문화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코리아 아츠 위크의 마지막 날인 7월 22일. 우리는 마지막 주자로 무대 위에 섰다. 한국에서 진행한 사전 미팅에서부터 섬세한 배려로 우리를 맞이한 링컨 센터의 창작진은 그 위상에 걸맞은 뛰어난 팀워크로 음악가들의 기량을 최상으로 끌어냈다. 공연을 향한 모두의 노력은 관객들의 기립 박수로 이내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한편,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관객 대부분이 국악과 한국음악에 익숙함을 느끼고 있으며 공연장에 예술을 전공한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점이었다. 음대에서 작곡과 영화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한 관객은 대부분의 국악기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한국 전통음악에 큰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본인이 들어본 현대음악 중 가장 균형미가 뛰어난 음악이었다며 우리 공연에 평가를 남겨주었다. 그와 동행한 또 다른 관객은 그레이바이실버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민족음악가 김순남의 가곡에 깊이 매료되어 그에게 다른 작품들과 동시대 한국 예술가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첨예하게 예술 세계를 키워나가고 있는 뉴욕 학생들에게 한국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전할 수 있어 기쁜 마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미 수준 높은 배경 경험을 가진 관객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기 위해선 단순 경험에 그치지 않는 꾸준한 창작을 이어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랜 시간 준비하였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열정을 쏟아낸 무대이기에 링컨 센터를 떠나며 많은 감정이 교차하였다. 함께 무대를 만든 링컨 센터 동료들의 미소와 476명의 관객들이 보낸 뜨거운 박수는 우리에게 충만한 위로를 전해주었다.
도시 외곽에서는 어떤 움직임들이 일어나는가?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 뉴욕 맨해튼을 뒤로한 채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뉴욕 북부의 한적한 마을 킹스턴을 방문했다. 2018년도 쇼케이스에서 처음 만났던 이사벨 소퍼(Global FEST 창립자, ‘The Local' 공연 프로그래머)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녀는 당시 우리 음악을 깊게 들어준 사람 중 하나로 미소가 참 따듯한 사람이었다. 5년 만에 만난 이사벨을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받은 뒤 차후 공연을 함께 의논하였다.
첫 번째로 안내해 준 곳은 ‘오퍼스 40(Opus 40)’. 이곳은 한 남자가 37년 동안 중장비 없이 만들어 낸, 시간의 흔적이 짙게 밴 거대한 돌 공원이다. 이곳은 매년 여름밤이면 아늑하고 은밀한 지역 축제의 장으로 변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음악을 듣는다고 한다. 이후 낡은 교회 건물을 새로이 단장하여 올해 초에 오픈한 그녀의 공연장 '더 로컬(The Local)'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장 입구에는 '자이언트 스텝(Giant Step)’이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는데, 재즈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기에 그 의미를 물어보았다.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 미국에서는 어린이 보육 시설(데이케어센터)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일부러 남겨놓은 출입문의 문구처럼, 그 정신을 이어가는 이곳은 현지 사람들과 외부인들이 공연예술을 통해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까운 미래에 그레이바이실버의 공연도 함께 만들고 싶다는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사벨은 꾸준히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오고 있다. 뉴욕 중심부에서 거대한 페스티벌과 공연들을 운영하며 직접 겪은 바쁜 도시의 속성에서 벗어난, 더 긴 호흡을 그녀는 바라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관객과 음악가 모두 따뜻한 차와 과일을 음미하며, 이 음악은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이 순간의 조우가 어떤 파동을 불러일으키는지, 또 어디로 흐를지를 마음껏 이야기하는, 그런 짙은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그녀의 눈빛은 강한 빛을 내뿜었다.
좋은 공연은 반드시 좋은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좋은 상황은 함께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공연 역시, 비즈니스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일이기에 서로를 알아가고 시간을 함께 보낼수록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부족하지 않게 전달하는 데 급급했지만, 이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재즈의 인터플레이(즉흥연주를 통한 대화)처럼, 사람들과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이 시간들은 울타리 밖, 신비로운 지점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예술 연대
다시 돌아온 맨해튼의 중심부. 다양한 문화와 장르의 공연이 매일 펼쳐지는 복합 예술극장이자 뉴욕의 거대한 예술 Union의 중심지, ‘더 퍼블릭 시어터(The Public Theater)’를 찾아갔다. 미국 최초의 비영리 극장 중 하나인 이곳은 극장이 필수적인 문화의 힘이며, 예술과 문화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오랫동안 운영되어 왔다. 또한 도시의 수많은 축제와 공연을 기획하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예술 흐름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링컨 센터를 비롯한 저명한 예술 기관들과 협력하여 다양한 양질의 예술을 공급하는 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우리는 더 퍼블릭 시어터의 산하 극장인 ‘조에스 펍(Joe's Pub)’에서 저녁 공연을 진행하며 뉴욕의 밤을 회색으로 물들였다. 이와 함께 링컨 센터의 공연을 보고 그레이바이실버의 무대를 다시 찾아와 준 고마운 관객들과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
신선한 경험을 넘어, 현시대 한국음악을 꾸준히 전할 때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필자는 늘 ‘예술의 민족’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는 예로부터 풍류를 사랑했고, 모든 시민들의 활동 속에 깊은 예술적 정서가 묻어있는, 배달보다는 분명 예술을 깊게 다루어 온 아름다운 민족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예술성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실감한다.
올해 아르헨티나, 모리셔스, 유럽,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대륙과 지역을 다녀오며 놀란 점은 한국문화산업이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딜 가도 필자보다 한국 영화, TV 프로그램, 대중음악 등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하였다.
K-pop이 대외적으로 많은 소식을 전해 주지만, 필자가 만나온 사람들은 오히려 순수 한국음악 동향에 대해 더욱 관심이 많았으며 그 다음 지점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많은 해외 관객들은 이미 국악을 알고 있고 경험해 보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한 번의 ‘신선한’ 경험을 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흐르고 있는 현시대의 한국음악을 지속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예술’ 그리고 ‘사람’을 향해 해외로 나간다
필자는 ‘해외 공연을 왜 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수년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한국음악을 알리기 위해서 혹은 범세계적인 관심을 얻고 싶어서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넘어, 다양한 문화 속에 던져져 그들과 섞이고 또 구분 지어지며, 투명한 시선에서 우리의 음악을 바라보고 싶다. 모든 경계를 지워버리고 온전히 음악만으로 순수하게 사람들과 공명하는 시간이 우리를 올바르게 이끌 것이라고 믿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모든 발자취를 기록한 투어로그 ‘The Way of Gray #2'를 그레이바이실버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이번 투어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센터스테이지코리아> 사업과 에이전시 '사운드퍼즐(Sound Puzzle)'